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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은 경상도에서 최초로 1902년 지어진 성당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서품을 받은 성당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으로 유명한 성당입니다.

그당시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으로 불렀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험에 등장하던 김원일 작가의 마당 깊은 집이네요.

우리나라의 근대는 대한제국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말하는데 이 소설은 배경이 현대에 속하네요.

1954년 6.25 전쟁 후 대구에 정착한 어려운 피난민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까요.

드라마로도 방영된 적도 있습니다.

실제 소설의 무대가 된 집은 아니고 소설 내용과 가장 비슷한 집을 골라

기념관을 만들었는데 역시 이곳도 문을 닫아 골목만 보고 갑니다.

 

블로그를 쓰면서 다시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려운 집안을 이끌어야 하는 길남의 성장이 주된 줄거리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길남 어머니의 벽에 쓴 말은 너무 자식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말인 것 같네요. 어렵지만 용기를 북돋는 칭찬의 말이어야 하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을 따라와 대구 중구에 정착한 중국인 두사충의

얘기도 벽화로 볼거리를 만들어 잠시 미소를 띠며 읽어 봤습니다.

 

 

일제 시대 민족의 저항시인 이상화 시인이 말년을 지내던 고택이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근대화 골목투어의 주요 관람지가 되었습니다.

 

 

고교시절 국어 공부를 위해 누구나 읽어 봤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입니다.

시인은 해방된 조국을 못 보고 이곳에서 42세에 타계했다 합니다.

 

 

 

                                 계산예가 마당에 있던 인력거에서 마나님 사진 한 장.

 

보부상으로 큰돈을 벌어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을 벌여

나라의 자존을 높이자 외치며 보상운동을 이끌 던 서상돈 님의 고택을

이상화 고택과 연계되게 이곳에 재현해 지었다 합니다.

아마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 비슷하리라 봅니다.

다만 일제의 부채를 국민이 대신 갚는 운동이라 그 의미는 더 크리라 봅니다.

 

그래서인지 대구 시내에는 국채보상로란 거리가 있습니다.

 

 

이상화 고택 바로 옆에 있는 주막집. 문은 열었는데 아직 손님은 안 받네요.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이 보여 무슨 사연인가 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다시 역으로 골목을 거슬러 진골목 쪽으로 향합니다.

아마도 이 길이 대구시내를 거쳐 문경새재를 향해가다가 고개를 넘어

충주, 여주 청미천, 탄천을 지나 한양으로 가던 한양 천리길의 구간이었던 모양입니다.

 

과거에 급제해 어사화관을 쓰고 고향으로 향하는 말타고 으시대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길 양쪽으로 한약 약종상이 즐비한 약전골목입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한의약박물관 입구를 지납니다.

 

구 제일교회 건물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역시 박물관 내부는 코로나로 휴관 중입니다.

 

마당에 전시된 전시물만 보고 한식 일주문으로 된 입구를 나옵니다.

 

 

약물로 된 족욕장인데 이곳도 운용을 안 하네요.

지친 발을 쉬기가 좋은데 아쉽습니다.

 

이 골목에 사는 8명의 부인네들로부터 국채 보상 운동 적극 참여가 시작됐다 합니다.

 

대구 중심가에 이런 골목길이 존재하니 경이롭습니다.

현지분들은 불편하시겠지만 오래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대구 서화가로 유명한 서병오 선생터가 빌딩으로 바뀌어 그 빌딩 입구에

연혁과 작품 복제품으로 장식해 놨습니다.

이번에 대구에 와서 달성 서 씨 문중의 힘을 느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미도다방 안 들어가 볼 수가 없네요.

 

이곳의 자랑인 쌍화차를 시키니 옛 생각나게 계란 노른자 동동 띠우고

전병  과자를 한 접시 그득 갖다 줍니다.

친구와 옛 얘기하며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갑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다녀 갔다는데 그분들의 싸인은 없네요.

옛 대구 서화가들의 글씨와 그림만 그득 합니다. 한복 입은 마담님 잘 쉬었다 갑니다.

 

정소아과도 대구 서 씨 한분이 지었다는 최초의 민간 양옥집인데

소아과 원장님이 인수하여 진료하다가 작고 하시고 그 아드님이 이어서 지금도

운영하시는데 6시가 되어 문을 닫았네요. 문이 열려 있으면 정원을 구경해도 된다 합니다.

 

가운데 두 분의 모습이 국채 보상운동을 시작했던 서상돈 부부의 모습이라 하는데

고택에 있던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라 갸우뚱합니다.

 

정소아과 바로 옆 골목 끝에  현대 조각 미술품이 있는데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오늘 근대로의 투어 마지막 코스인 화교 학교입니다.

               이 땅도 대구 서 씨 부자의 땅이었는데  화교들한테 팔아 화교 학교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른답니다.

             아이러니하게 지금 학생 구성이 화교보다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 아이들이 더 많답니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같이 교육하니 그들에겐 한국 학교보다 더 좋은 선택 같아 보입니다.

 

                     여기를 마지막으로 6시가 지나 지하철을 타고 안지랑역에서 내려

                                대구에서 유명한 안지랑 곱창 골목으로 향합니다.

 

                          셋이서 세트 1번으로 했는데 결론은 많이 남았네요.

                     밥도 된장찌개와 한 공기만 시켰는데요. 왜 인지는 상상해 보세요.

 

 

초벌을 해 줍니다. 한 참 먹다 보니 어금니가 뻐근합니다.

소주가 좋을 땐 좋은 안주지만 지금은 아니라서.

 

코로나로 골목이 썰렁합니다.

어서 빨리 지나가서 다시 활기찬 안지랑 곱창골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전철을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친구는 기차를 타고 영천으로

아쉬운 이별을 하고 저희는 숙소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아침 8시 30분쯤 숙소를 나서 팔공산 갓바위를 갈 예정입니다.